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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동장씨 족보가 언제 처음으로 편찬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문헌을 상고해 볼 때 중종 28년(1533) 죽정(竹亭) 장잠(張潛)과 판서공(判書公) 장렬(張烈, 여헌의 父)께서 합심하여 종계(宗契)를 창설하고 족보를 중수(重修)한 후 서문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족보(舊譜)가 있었음을 알 수는 있습니다.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 때 본향(本鄕) 인동은 왜병(倭兵)의 진격로에 놓여 있어 공사가옥(公私家屋)이 많이 소실되었습니다. 이때 인동장씨 종가와 세전(世傳)하여 오던 중수보(重修譜)도 소실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이전 족보도 함께 소실된 것이 아닌가합니다.
임진란 후(1590년대 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께서 임진난 전에 중수보를 본 것을 기송(記誦, 기억하고 외움)하고, 문중 어른들께 들은 바를 상고하여 고려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神虎衛) 상장군(上將軍) 장금용(張金用)을 시조(1세조)로 하여 21세까지 세계(世系)의 대강을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여헌수록(旅軒手錄) 또는 문강공수기(文康公手記)라 하며, 이후에 만들어진 우리 족보는 모두 여헌수록을 근간(根幹)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인동장씨의 현존(現存)하는 대동보(大同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영조 45년에 간행된 기축보(己丑譜, 옥산장씨세보)입니다.

